‘먹신’의 위엄?!

녀석이 어느새 청년(?)이 다 됐습니다. 어디서 어떻게 배우는 건지 한국말도 너무너무 잘하고 항상 웃는 얼굴, 밝은 표정의 에이든은 그 또래의 사내아이들이 그렇듯 장난끼 또한 갈수록 수북해집니다.

지난주 금요일에는 잠시 시간을 내서 녀석들을 만나기 위해 딸아이 집으로 갔습니다. 요즘 들어 부쩍 할머니에게 살갑게 구는 에이든은 그날도 이모 같은 할머니 옆에 바짝 붙어 앉아 그림책도 보고 할머니 목에 매달려 깔깔대기도 하며 마냥 즐거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한 시간 남짓 녀석들과 함께 있다가 우리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에이든도 현관까지 따라 나왔습니다. 하지만 녀석에게 빠이빠이를 청하자 녀석은 뒤도 안 돌아보고 슬금슬금 거실 쪽으로 가버렸습니다.

몇 차례 녀석을 불렀지만 에이든은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엄마 품에 안겨 연신 고사리 손을 흔드는 에밀리하고만 ‘쪽!’ 소리 나는 뽀뽀를 나누고 현관문을 닫았습니다.

“에이든이 우리가 간다고 섭섭해서 그러는 거야. 아까 우리가 약속이 있어서 가야 한다고 얘기할 때부터 애가 표정이 안 좋더라구.” 벌써 그렇게 큰 겁니다. 모처럼 집에 놀러 온 할머니 할아버지가 좀더 함께 있어주지 않고 빨리 일어서는 게 녀석은 못내 아쉬웠던 겁니다.

혼자 거실로 들어간 녀석은 어쩌면 바닥에 엎드려 눈물을 삼키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늘 그렇지만 녀석도 그렇고 우리도 그렇고 최소 두세 시간은 함께 해야 섭섭함이 덜하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는 에밀리가 한바탕 큰 웃음을 줬습니다. 목요일 오후, 치열하게 마감작업을 하는데 에이든과 에밀리가 회사로 들어섰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천사들의 등장에 모든 업무는 잠시 마비(?)상태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에밀리가 지 엄마 품을 파고 들었습니다. 우리는 모르고 있었는데 맞은편 사무실 신화웨딩 사장님이 녀석을 향해 포도봉봉 캔음료를 흔들며 유혹(?)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얼굴에는 환한 웃음을 띠고 있었지만 건장한 체구에 얼굴에 구레나룻이 가득한 그 사장님이 아직도 낯가림의 잔재(?)가 남아 있는 에밀리에게는 경계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의 웃음 속에 에이든이 얼른 달려가 포도봉봉을 받아 들고 왔습니다. 그러자 재미있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미 먹순이 아니, 먹신(神)으로 유명한 에밀리가 지 오빠가 들고 온 시원한 캔을 보더니 갑자기 그쪽 사무실로 걸어가는 거였습니다.

문 앞에서 안쪽을 보며 서성거렸지만 임무(?)를 마친 그 사장님은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가셨고 잠시 그렇게 있던 에밀리는 이내 우리 쪽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녀석이 다시 그 사무실로 가더니 이번에는 용기를 내 조금 안쪽까지 들어갔습니다. 안을 열심히 기웃거렸지만 사장님이 보이지 않자 녀석은 조금은 아쉬운 표정으로 돌아왔습니다. 아까 지를 부를 때는 숨기 바쁘더니 지 오빠가 먹을 것을 받아 들고 오자 용기백배 한 겁니다.

세 번째 도전, 이번에는 에밀리가 사무실 안쪽까지 조금 더 깊숙이(?) 들어갔고 마침내 신화웨딩 사장님과 눈이 마주쳤나 봅니다. 냉장고에서 갓 꺼낸 시원한 포도봉봉을 손에 든 에밀리는 여느 개선장군 못지 않은 표정으로 돌아왔습니다. 얼굴에는 뿌듯함이 가득한 채로….

그날 에밀리의 먹신으로서의 위엄은 마감작업에 지쳐있던 우리 모두에게 신선한 웃음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집안에 아이들이 있어야 웃을 일이 생긴다’는 옛 어른들의 말씀이 딱 맞는 것 같습니다.

이제 52개월이 된 에이든이 느끼는 짧은 만남 긴(?) 헤어짐에 대한 아쉬움이나, 먹을 것을 향해 돌진해 끝내 목표를 이뤄내는 20개월짜리 에밀리의 당당함도 모두모두 우리에게는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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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선 tonyau777@gmail.com

<코리아타운> 대표. 1956년 생. 한국 <여원> <신부> <직장인> 기자 및 편집부장, <미주 조선일보> 편집국장. 2005년 10월 1일 <코리아타운> 인수, 현재 발행인 겸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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