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 파라마타 공원을 아내와 함께 걸었습니다. 자카란다 보라색 꽃들로 둘러싸인 오솔길 입니다. 처음 와본 토요일 오전의 자카란다 꽃길은 한적합니다. 조금 후, 내 키 정도의 철문과 마주쳤습니다. 살며시 밀어보니 철문이 소리 없이 열립니다. 안으로 조금 더 들어가니 채플이라는 조그마한 간판이 보입니다. 일요일의 예배시간 안내도 있습니다. 아담한 이곳에 들어갔습니다. 내부는 20 여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고 삼각형의 모습입니다. 창문을 통해 비쳐지는 냇가가 아름답습니다. 그동안 내가 느껴 보지 못했던 포근한 교회입니다.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우리는 기도도 하고 찬송도 몇 곡 부르고 나왔습니다.
두 번째로 예배시간에 맞추어 다시 찾아 왔습니다. 조심스럽게 들어가니 예배가 막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10 여명 정도 앉아 있습니다. 앞에서 인도하던 호주인 목사님은 나에게 다가와 웃으며 볼펜과 바인더를 줍니다. 코로나19로 방문자 기록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내와 나의 이름을 적고 각각의 전화번호도 적었습니다. 예배의 분위기가 조금은 낯설었고 어딘가 모르게 어수선 했습니다. 그러나 그 호주인 목사님은 차분하게 개개인을 일일이 응대하며 예배를 인도 하였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나오려는데 한 남자가 다가와 한국 분이냐고 물으며 자신도 한국 사람인데 이 교회의 파트타임 목사이며 매 주일날만 온다고 합니다. 그리곤 한국여자 한사람이 있는데 대화를 나누어 주면 좋겠다고 합니다. 우리 부부는 그 목사님의 소개로 ‘카트리나’ 라는 이름의 한국 여자를 만났습니다. 그 녀는 예배 중에 일어나 찬양도 하고 목사님에게 무언가 묻기도 했던, 조금은 엉뚱한 모습을 보이던 몇 몇 중의 한사람이었습니다.
카트리나는 먼저 자신을 소개합니다. 이곳에 온지는 2개월이 조금 지났으며 앞으로 2년 정도 더 있어야 한다고 하며 자신은 3남매의 엄마라고 합니다. 첫 번째 남편은 죽었고, 두 번째 남편은 난폭하고 나쁜 사람이며 지금은 보이 프렌드가 있다고 합니다. 카트리나는 태어 난지 4개월 만에 이곳 호주로 입양되어 알버리 라는 곳에서 성장했으며 그곳에는 자신의 3남매가 양부모와 함께 살고 있다고 합니다. 알버리 (Albury)는 시드니에서 자동차로 7시간 정도 소요되는 조그마한 도시입니다. 몇 년 전, 승용차를 타고 멜버른을 다녀왔을 때, 호주 행정 수도인 캔버라를 지나 한참 후에 나타나는 알버리를 그냥 지나쳤던 기억이 납니다.
카트리나는 그동안 한국 사람은 만난 적이 거의 없으며 한국어 또한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딱 두 가지는 말할 수 있다며 “김. 계. 영.” “김. 민. 아.” 라고 유치원 어린이같이 한자 한자 힘주며 또박 또박 발음했습니다. 김계영은 자신의 한국 이름이며, 김민아는 자기를 낳은 엄마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아내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카트리나는 좌우를 계속 두리번거립니다. 어딘가 모르게 약간의 정신적 장애가 있는 듯 했습니다. 계속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내가 너를 허그 해도 좋으냐? 라고 아내가 물으니 카트리나는 대답도 없이 얼른 아내의 품에 꼭 안겼습니다. 서로 껴안은 모습이 영락없는 모녀사이 입니다. 우리와 헤어질 무렵 카트리나는 아내를 다시금 포옹하며 말합니다.
“혹시 너는 나의 엄마 아니냐?” 조금 후엔 “내가 엄마라고 불러도 되냐?”
“그래! 그래! 엄마라고 불러라, 나는 너의 엄마다”
아내는 그를 더욱 힘주어 안아주었습니다. 카트리나는 한참이나 아내를 꼭 껴안으며 말합니다.
“나는 나의 엄마를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 왜 나를 버렸는지……, 무슨 일이 있었을 것이다. 나도 지금 내 아이들을 못보고 있다”
카트리나는 소리 없이 울고 있습니다. 이 말을 할 때에는 아무런 정신적 결함이 없는 듯합니다. 오히려 사려 깊게 보입니다. 아내가 말 했습니다.
“그래, 너의 생모도 어쩔 수 없는 무슨 일이 있었을 것이다”
카트리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껴안습니다. 카트리나는 말을 이어갑니다. 다음 달 말엔 아이들 삼남매가 자기를 만나러 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탕을 100불어치나 사놓을 거라고 우는 듯, 웃는 듯 말합니다.
아내는 집에 돌아와 딸과 통화합니다. 오늘의 일들을 설명하니 그곳은 주 정부의 정신병원이며 우리가 예배드린 곳은 그 병원교회라고 합니다. 그곳은 정신병원 내부 시설이니 더 가지 말라고 딸이 말하는 모양입니다. 그 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정신적 문제가 있는 환자이니 환자로 대하여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곤, 다시 가지 말라고 당부하는 것 같습니다.
카트리나는 어떠한 사고를 일으켰으며, 그 어떤 일로 수감되었다가 정신병원인 이곳에 수용되었으며 일요일엔 예배시간이 허용되어 일반인도 만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측될 뿐입니다. 나도 정신병원 내부 시설이라고 하니 조금은 무섭기도 하여 잊어버리려고 하는데, 아내와 눈을 맞추며 이야기하던 카트리나가 나의 가슴에서 사라지질 않습니다.
갈까 말까, 간사한 내 마음이 왔다 갔다 합니다.
일찍 저녁을 해결한 우리 부부는 평소와 같이 한인 식품점에 들렀습니다. 아내는 이것저것 무, 배추와 필요한 생필품들을 내가 끌고 따라다니는 트롤리에 넣습니다. 어느 한곳에 머물던 아내가 나를 바라보며 웃습니다. 그리곤 한국사탕 3봉지를 집었습니다. 태극기 장식품이 대롱대롱 달려있는 한국기념품 3개도 집어 함께 트롤리에 넣습니다. 왔다 갔다 하던 간사한 내 마음이 진정되었습니다.
보라색 꽃길을 걸어 세 번째, 다시 이곳에 들어왔습니다. 아내의 핸드폰이 울립니다. 딸이 어디냐고 묻는 모양입니다. 아내는 쇼핑하러 가는 중이라고 말합니다. 꽃길을 걸으며 우리는 서로 웃습니다. 우리는 아이들이 중학교 1학년과 초등학교 5학년을 마친 후, 이곳 호주 시드니로 이민 왔습니다. 우리 가족이 이곳에서 처음 생활을 시작할 때, 아이들에게 당부했던 말들이 생각납니다.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한다, 이곳엔 하도 이상한 사람들이 많으니 항상 조심해야 한다, 특히 아들에겐 담배피우는 친구들은 사귀면 안 된다, 담배피우다가는 마약소굴로 들어가게 되는 거란다, 어디를 가던 지 행선지는 꼭 알려야 한다. 등등의 잔소리를 엄청 했었는데, 오늘은 우리 부부가 딸의 당부를 무시하고 이곳 정신병원 교회를 찾았습니다. 마치 ‘우리도 너희들 몰래 하는 일이 있단다.’ 하는 것 같습니다.
젊은 남자 한사람이 채플 입구 긴 의자에 앉아 있습니다. 그의 복장을 보니 그 병원 간호사입니다. 우리가 조금 늦었는지 예배는 이미 시작 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젊은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조심스럽게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이곳에 온 사유를 이야기 했습니다. 처음 대할 때에는 조금 짜증스런 표정 같았는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의 얼굴이 많이 부드러워 지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그는 지금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정신병원 환자들이며 우리가 만난 카트리나도 잘 알고 있다고 합니다. 자신의 의견은 우리의 생각이 참으로 감사한 일이지만 더 이상 만나는 것은 좋지 않다고 합니다. 우리 딸의 말과 똑같았습니다. 정신병자는 정신병원에서 환자로 치료해야지 개인적으론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카트리나는 부모도, 아이들도 자유롭게 만날 수 없다고 설명합니다. 우리가 어찌하는 것이 최선인가 물으니 그냥 돌아가고 다시 오지 않는 것 이라고 합니다. 아내가 그럼 이 사탕만 전해주고 가면 어떨까 하고 물으니 너의 마음은 고맙지만 그 사탕도 그냥 가지고 가라고 합니다. 우리는 조용히 일어났습니다.
사탕봉지 3개를 다시 싸들고 그 곳을 빠져 나왔습니다. ‘엄마! 엄마!’ 부르는 카트리나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오는 것만 같습니다.
장석재 (문학동인캥거루 회원·수필가·제14회 재외동포문학상 수필 대상·수필집: 둥근 달 속의 캥거루, 그림동화: 고목나무가 살아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