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이르는 병

키에르케고르의 책 이름이다. 아주 오래 전에 암에 대한 철학적 소고인줄 알고 책을 집어 읽었는데 실존주의 철학 책이었다. 이 귀엽고 얌전하게 생긴 덴마크 철학자에 의하면 인간은 3 단계의 실존을 경험하게 된다고 한다. 심미적 실존, 윤리적 실존 그리고 종교적실존이다. 그리고 앞의 두 개의 실존은 결국은 인간이 지향해야할 궁극적 실존인 ‘종교적 실존’으로 나아가기 위한 예비 단계이다.

 

심미적 실존은 다른 말로 쾌락주의적 실존이다. 대체로 보통 사람들의 실존이다.  좋으면 하고 싫으면 하지 않는다는 쾌락주의 원칙에 따라 매사를 판단하고 사는 모습이다. 본능에 따라 사는 삶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나’와 ‘나의 이익’에 따라 정렬되어 있다. 그런데 이렇게 살다 보면 어느 시점에 도달해서 스스로에게 절망하게 된다. 왜냐? 쾌락은 늘 도달하면 또 한 발치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고 나는 다시 그 쾌락을 잡기 위해 온갖 수고를 겪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는 시기심과 경쟁심리에서 오는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기도 한다. 쾌락이 나를 쥐락펴락하고 있다는 사태를 깨닫게 된다. 그 환락의 섬에는 주이상스는 있지만 ‘자유’가 없다. 출구를 다시 찾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것보다 조금 차원이 높은 실존이 있다. 윤리적 실존이다. 이건 공자가 말하는 수신제가의 철학을 모토로 갖고 사는 삶이다. 2년 전쯤 한국 고속도로 휴게실 화장실을 사용한 적이 있었다. 화장실 벽에는 무슨 구호 같은 것이 적혀 있었는데 그 내용이 ‘착하게살자’였다. 화장실을 깨끗이 사용하라는 말 같았는데 호주 같았으면 ‘정조준 하세요’라고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했을 것 같다. 암튼 남에게 피해 안주고 착하게 살려고 하는 것이 윤리적 단계의 실존이다. 그러나 그게 내 맘대로 되던가? 안 된다. 마음은 원이로데 육체가나의 끈질긴 본능이 따라주지 않는다. 그래서 착하지 않은 일을 하게 된다. 그리고 절망한다. ‘테스 형, 난 왜 이래’ 하면서.

 

이 지점이 다음 단계인 종교적 실존으로 들어가는 문이 된다.  난 천상 죄인이라 안돼, 그러니깐 절대자에게 귀의하자라는 생각이 든다. (기독교 문명권에서 케에르케고르는 살았다) 종교적 단계이다. 종교적 단계는 심미적 윤리적 실존을 초월한다. 여전히 쾌락을 추구하고 여전히 죄를 짓고 살수 밖에 없지만 그 부조리한 실존 전체를 절대자에게 맡기고 귀의한 상태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여기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받치는 장면을 자세하게 기술한다. 우리의 상식과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신앙은 일종의 결단을 요구한다. 아브라함은 날카롭게 간 칼을 높이 들어 이삭을 내리친다. 이삭 또한 모든 것을 아버지에게 맡긴다. 그러나 하늘에서 음성이 들리고 이삭을 대신한 양이 나타난다. 드라마는 끝나고 아브라함은 모든 종교적 실존의 조상이 된다.

 

이것은 번지 점핑과 흡사하다. 나의 행위의 결과를 점핌 도구에 맡기고 점핑을 하면 그 이후 새로운 실존이 열린다. 종교적 신앙적 실존이다. 오직 번지 점핑을 한 자에게만 열리는 새로운 세계이다. 지식으로도 수많은 독서로도 사색으로 열리지 않는다. 오직 죽음이라는 심연을 바라보면서 두려움과 떨림을 억누른 채 나의 전 존재를 파아란 옥빛 칼라로 급류하는 계곡 물 위로 던져야 한다. 그리고 나서 시작되는 오! 니르바나! 그건 오직 뛰어본 사람만이 경험할 수 있는 실존이다. 이것이 키에르케고르가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그래서 그의 다른 책 명은 ‘이것이냐 저것이냐’이다. 본능적 실존과 윤리적 실존과 종교적 실존 중에서 택일하라는 말이다. 종교적 실존이라고 해서 반드시 종교를 갖는 문제가 아니다. 심미적 윤리적 수준을 넘어 나의 존재에 대해 진지하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면 그것이 종교적 실존이다. 그럼 종교적 실존의 구체적인 모습을 뭘까?  한마디로 자리이타의 삶이지 않을까? 다른 말로 인간과 자연, 모든 생명체에 대한 무차별적인 사랑이 아닐까? 그 근원은 나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내 안의 무한자로부터 근원하는 사랑….

 

지천명을 넘은 이 나이에 과연 지금 나는 어떤 실존을 살고 있을까?  오랜만에 혼란했던 젊은 시절 우연히 읽었던 ‘죽음에 이르는 병’을 다시 추억해보았다.

 

 

최무길 (캥거루문학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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