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완견

대한민국 야당 정치인이 권력의 입맛에 맞는 기사만을 써대는 언론을 애완견에 비유했다. 그러자 일부 언론이 ‘기성 언론은 기득권 체재의 일부’라는 세평을 증명하듯 거칠게 항의했다.

나는 새삼스럽게 언론의 역할과 기능,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에 관련된 공익성, 보편성, 공통의 사회규범, 가치관 같은 진부하고 쉰내 나는 주장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권력을 추종하는 그 질긴 권력욕과 출세욕에 찌들어 기득권 체재의 일부가 되어버린 살아있지 않은 언론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언론인 손석희는 2016년 4월 27일 ‘Jtbc 뉴스룸 앵커브리핑’을 통해서 이런 말을 남겼다.

“많이들 아시겠지만 언론은 언론학자들 사이에서 흔히 개에 비유되곤 합니다. (중략) 그중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은 워치독 (Watch dog)과 랩독 (Lap dog)입니다. 워치독은 ‘감시견’을 뜻하지요.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을 감시하며 자유주의 체재의 가치를 지키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즉, 건강한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을 위해선 언론의 역할이 그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랩독은 말 그대로 권력의 ‘애완견’ 같은 언론을 뜻합니다. 주인의 무릎 위에 올라앉아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달콤한 간식을 받아먹는 그 안락함에 취해버린 언론이라는 비판을 받습니다. 랩독은 결코 권력구조에 비판적일 수 없습니다. 다만 거기에 동화되고 기생할 뿐이지요.

이런 단순한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가드독 (Guard dog) 즉 ‘경비견’이 있습니다. 경비견은 이미 그 자신이 기득권에 편입돼서 권력화 됐고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는 때론 자신이 경호해왔던 그 권력마저 공격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언론보도 행태에 대한 약간의 고민으로 그 이후에 벌어질 언론상황에 대한 예견이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뭐 굳이 예견이랄 것도 없이 이런 현상은 과거에도 반복됐었고 앞으로도 얼마든지 반복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고 아무도 지배하지 않는 것, 요는 살아있을 것이냐 살아있지 않을 것이냐 입니다.”

나는 얼마 전에 임명된, 사회정의와 인간의 가치를 부르짖던 한 언론인 출신의 대한민국 방송통신위원장의 인사청문회를 보면서 애완견에 비유된 언론의 실체를 확인하고 수치와 절망과 분노를 마주했다.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 (Adolf Hitler)는 세계 2차대전을 일으켜 군인 민간인을 합쳐 4700여만명을 사망케 한 인류 최대비극을 몰고 온 괴물이다.

이 비극을 몰고 온 히틀러의 숭배자이며 나치즘의 화신인 나치독일의 정치인 요제프 괴벨스 (Joseph Goebbels)는 나치독일 중앙선전국장과 국민계몽선전부장관을 맡으면서 제일 먼저 언론을 권력에 충성, 맹종하게 만들었다. 더 나아가 연극, 영화, 문학, 음악, 미술계까지 손을 뻗쳐 히틀러에 대한 반대논리를 강력한 억압으로 완벽하게 잠재웠다.

누구나 다 알고 있듯이 대한민국 방송통신위원장 자리는 대한민국 언론구조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막강한 자리다. 괴벨스 같은 권력의 빌런이 될 수도 있고 ‘바이든 날리면’ 보도로 권력의 심사를 불편케 만든 언론을 분해해버릴 수도 있고 정의의 감시견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고성이 난무한 방송통신위원장 인사청문회는 애완견을 넘어 상황에 따라 너무나도 쉽게 경비견으로 돌변할 수 있는 필연성까지 확인시켜주었다.

그는 과거 소속된 MBC 간부시절 노동조합탄압 계획을 수립하고,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에 극우성향정권의 주장을 나열했다. 또한 문제된 각종 의혹의 검증자료를 미제출로 버티면서 발뺌과 궤변으로 국민들의 가슴에 염장을 질렀다.

그는 바르게 말하는 연예인들과 국민적 사랑을 받는 암살, 택시운전사, 베테랑, 기생충 같은 영화에 ‘좌파’라는 기상천외한 딱지를 붙였다. 그렇다면 이 영화를 본 국민들도, 나도 좌파인가?

그는 2003년 종군기자로 활동하면서 이라크전쟁을 세계패권주의를 내세우는 강대국에 희생당하는 약소국의 전쟁이라는 냉철한 시각으로 보도했다. 그는 전쟁에서 무너지는 민간인의 처참한 희생에 울분을 토했다. 나는 그의 언론의 정의, 인간에 대한 가치관에 박수를 보냈다. 그런데 그 당당하던 언론의 정의는 놀랍게도 세월 따라 권력욕, 출세욕으로 변질돼 있었다.

그의 삶의 무게와 질감은 한없이 가벼웠고, 일정한 테두리의 특정세력을 추종하는 철저한 애완견이었다. 그는 인간으로서 보편적인 도덕법칙마저 부정하는 정체성도 역사성도 상실해버린 사이코패스에 다름 아니었다.

그는 철저하게 권력욕과 출세욕에 찌들어 괴벨스를 닮고 싶어하는 개 같은 언론이었다. 그는 주인의 무릎 위에 올라앉아 달콤한 간식을 받아먹는 애완견이거나 기득권에 편입돼서 권력화된 경비견이었다.

공교로운 건지 현정권 아래는 개인의 영달을 위해 양심까지 짓뭉개며 꼬리를 흔드는 동종의 애완견, 경비견들이 넘쳐나고 있다. 에이브러햄 링컨이 그랬다. “그 사람을 알려면 권력을 줘봐라.”

개에 비유된 언론은 ‘최소한 나는 애완견은 아니다’고 외치면서 개 운운한 정치인을 명예훼손으로 고발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모든 언론이 ‘나는 길들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만, 과연 진정한 의미에서 길들지 않은 언론은 존재하는 것인지 의문부호다.

 

 

왜들 이러시나 | 온라인 코리아타운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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