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

내가 대학 다닐 때 읽은 책들은 주로 고전이었다. 당시 인문학에 관심이 있건 없건 대학생이라면 읽어야 할 필독서는 고전이라는 흐름이었다.

나도 그 흐름에 휩쓸려서인지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죄와 벌,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조지 오웰의 1984년,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프란츠 카프카의 성(城), 허먼 멜빌의 모비딕,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등등 꽤 많은 고전을 읽었다.

가정교사를 하면서 과외비를 받으면 제일 먼저 종로서적에 들러 을유문화사가 발행한 세계문학전집을 한 권 사 들고 표지를 쓰다듬으며 흐뭇해 하곤 했다. 그 작품들의 줄거리는 이젠 모두 아스라한 파편 같은 기억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그런데 유독 프란츠 카프카 (Franz Kafka)의 단편소설 <변신>의 줄거리는 뚜렷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 작품은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불리는 프란츠 카프카의 대표작 중 하나다. 소설 <변신>은 현실적인 문제를 비판하면서도 비현실적인 상황 설정을 통해 현대인의 소외의식과 부조리한 삶을 아프게 담아낸다. 소설의 내용은 현대인들의 삶과 다를 것이 없다. 이 소설을 읽던 당시 나의 삶이 고단했기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읽고 난 후 가난한 내 영혼은 방황했었다.

<변신>의 줄거리다. ‘그레고르 잠자’는 가족을 위해 힘들게 일하는 가장이다. 그레고르는 부모님과 동생을 부양하고 있다. 그는 판매원으로서 언제나 새벽 기차를 타고 출근을 해야 했다. 어느 날 새벽에 그레고르는 뒤숭숭한 꿈자리에서 깨어나 이불을 들치니 자신이 침대 속에서 등이 딱딱하고 많은 발이 꿈질거리는 한 마리의 커다란 벌레로 변해있었다.

그레고르는 일하러 가기 위해 일어나려고 버둥댄다. 어떻게든 일어나 출근을 하려고 해보았지만 벌레가 된 그레고르의 몸뚱이는 방문의 문고리조차 잡을 수가 없었다.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했다는 걸 알게 된 가족은 아무도 곁에 오지 않는다. 일터에서 친하게 지내던 동료들도 그레고르를 찾지 않았다. 가족과 주변사람들은 그레고르를 더 이상 인간으로 보지 않고 흉측한 벌레로 취급한다. 그레고르는 세상에서 내던져진 존재였다.

그레고르가 더 이상 돈을 벌지 못하자 가족들은 살아가기 위해 각자 일을 구해야 했다. 아버지는 하급관리에게 식사를 배달해주고 팁을 받고, 어머니는 옷을 수선해주거나 만들고, 여동생은 가게 점원으로 취직했다.

그레고르는 가족의 무관심 속에 버려지고 홀로 남겨진 세상에서 버텨야 했다. 그레고르는 가족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고독과 소외 속에서 서서히 죽어간다. 그레고르는 캄캄한 방에서 삶의 동기를 잃어버린 채 존재의 의미를 찾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문틈으로 가족의 얼굴을 훔쳐본 후 어둠 속으로 아픈 몸을 이끌고 사라진다.

나는 40대 후반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다. ‘지점장’이 사용할 수 있는 업무추진비 사용내역과 관련된 다툼이었다. 잠 못 이루며 고민하던 나는 의원면직을 선택했다.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었다.

직장을 그만두고 갈 곳을 잃어버린 나는 아침이면 아파트 뒤 바위산에 올라 눈 아래로 펼쳐지는 출근하는 차량행렬을 보면서 괴로워했다. 아들은 대학생이었고 딸은 대학입시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더 많은 경제활동이 절실했다. 나는 무엇을 할지 막막했다. 둘째 형님이 물품을 지원할 테니 사업을 해보라고 했고, 셋째 형님은 자신이 하는 사업을 쪼개 줄 테니 해보라고 권유했지만 용기가 없었다.

직장생활에만 20여년동안 몸담아온 나는 스스로 사업체를 운영할 자신이 없었다. 무엇보다 사업체를 운영할 수 있는 경제적 여력도 없었다. 아내가 물려받은 유산으로 구입한 아파트를 저당 잡히기는 두려웠다. 그렇다고 형님들에게 경제적 도움을 요청하기엔 염치가 없었다.

그렇게 방황하던 어느 날, 회사에서 이사로 근무하다 먼저 떠난 상사가 연락을 해왔다. 자신이 운영하는 사업체에서 함께 일하자는 거였다.

그가 운영하는 사업체는 견강보조식품을 판매하고 있었다. 유명 제약회사로부터 제품을 공급받아 세일즈맨들이 가정이나 일터를 방문해 판매하는 방문판매였다. 고정급이 아닌 성과급 시스템이었다. 나에게는 세일즈맨을 모집 육성 관리하면서 직접 세일즈에 나서길 요구했다.

그는 나에게 “너에게만 알려주는 거다. 누구에게도 말해서는 안 된다. 이 제품은 우리에게 1만원에 넘어온다. 그런데 우리는 12만원에 파는 거다”고 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이것이 건강보조식품시장의 흐름인가?

건강보조식품을 차에 싣고 그 동안 관계를 유지했던 사람들을 찾아 다녔다. 그들 대부분은 ‘터무니없는 가격’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쩌다 사주는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마지못한 단 한번이었다. 그의 태도는 필요가 아닌 동정이었다. 나의 자존심은 뭉개어졌다.

나는 그들에게 있어서 외면하고 싶은 껄끄러운 벌레가 되어가고 있었다. 나를 보면 아무도 반가워하지 않았다. 방문을 위해 전화를 하면 바쁘다면서 다음에 보자고 했다.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있었다. 어떤 친구는 그냥 식사나 한번 하자고 했다. 나는 소외되고 있었다.

‘지점장님’ 하면서 살갑게 대하던 예전의 사람들은 놀랍게도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게 차갑게 변해있었다. 나는 내가 성가시고 귀찮아졌다. 무심히 올려다본 새파란 하늘이 찢어질 듯 팽팽했다.

 

 

왜들 이러시나 | 온라인 코리아타운글 / 최원규 (칼럼니스트·뉴질랜드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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