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찌질이었다… 고막이 터져나갈 듯 요란한
스피커 소리, 오색찬란 번쩍이며 숨가쁘게 돌아가는 싸이키 조명… 노련한 DJ는 음악 중간중간 ‘선정성 멘트’를
넣어가며 분위기를 팍팍 끌어 올립니다. 플로어 위 100명이
넘는 사람들은 그 안에서 맘껏 춤 추고 박수 치며 환호합니다. 이윽고 플로어 위 조명이 꺼지고
잔잔한 음악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흠… 블루스 타임이군…” 앞에 놓여 있는 잔을 들어 깊숙이 들이킵니다. “차장님, 저랑 춤 한 번 춰요!” 언제 왔는지 이경란 기자가 내
앞에서 손을 내밀고 서 있습니다. “차장님, 얘랑 말고 저하고
한 번 춰요!” 좀 더 적극적인(?) 김수정 기자는 아예 내 손을 잡고 힘껏 끌어 당깁니다. “치… 차장님 정말 너무 하세요! 뭐가 그렇게 잘 났다고 끝까지 튕기세요?” “저는요, 다른 남자들이 아무리 블루스 추자고 해도 안 나가요. 근데 차장님은… 여자 마음을 너무 몰라 주시는 거 같아요. 아, 정말 자존심 상해…” 저한테 무시(?) 당한 두 여기자는 술을 벌컥벌컥 들이키며 기분 나쁨을 토로하고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여자가 남자한테 블루스를 청했다가 거부 당했으니…. 하지만 더 아쉽고 속상한
쪽은 저였습니다. 그 친구들은 제가 튕기는 거라 생각했지만, 사실
저는 블루스를 못 춥니다. “그냥 안고 서서 이리저리 움직이면 되지”
라고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창피한(?) 얘기지만 저는 이날 이때까지 아내와도 블루스 한 번 못 춰본 ‘찌질이’로 살고 있습니다. 기사마감을 하고 나서, 또는 기자들에게서 심하게 스트레스가 보일 때면 저는 회사 앞 삼겹살 집을 거쳐 그들을 나이트클럽으로 이끌곤
했습니다. 당시 우리가 자주 찾는 곳은 강남의 라마다르네상스호텔 지하 단코라는 나이트클럽이었습니다. 제가 워낙 춤에는 젬병인지라, 다들 신나게 춤 추고 놀 때 저는 혼자서 술을 마시곤 했습니다. 하지만
‘아주 가끔’ 저도 플로어에 나가긴 했습니다. 왠지 분위기가 안 뜰 때는 제가 먼저 “왜들 이러고 있어? 자자, 나가자구!” 하고
앞장서서 뛰어 나갑니다. 다행스럽게도 나이트클럽 음악과
조명이 워낙 요란한지라 그냥 서서 발만 살짝 떼고 손만 조금 흔들어도 열심히 춤 추는 것처럼 보입니다. 저는
이렇게 시동만(?) 걸어 놓고는 이내 자리로 돌아와 술을 마십니다. 소심한 A형답게(?) 저는 춤추고 노는 데는 많이 약합니다. 학교 때 친구들이 저에 대해 갖고 있는 인식도 한 마디로 ‘범생이’였습니다. 지난 겨울, 한국에
갔을 때도 친구들은 하나 같이 “태선이 저 친구 진짜 공부 잘 했지”
또는 “태선이 쟤는 학자였어, 학자” 하는 말들을 이구동성으로 쏟아냈습니다. 하지만 학창시절 제 마음 한
구석에 늘 들어 있는 ‘멋지고 부러운 모습’은 통기타 튕겨
가며 노래 잘 하는 친구,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 게임도 잘 하고 춤도 잘 추는 친구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성격 탓이었는지 아니면 분위기
탓이었는지 언제나 Top이라는 개념을 담고 ‘공부 잘 하는
친구’로 지낸 저의 학창시절 속에 이 같은 아쉬움이 진하게 숨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앞뒤가 꽉 막힌 채 공부에만 빠져 살아온 건 아니지만, 공부
이외의 것들에서도 ‘좀 더 활달하게 지내고 싶었던 아쉬움’이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아이들에게
그렇게 당부합니다. “공부도 공부지만 남들과 잘 어울리고 잘 노는 쪽에도 열심일 수 있게 하라”고…. 비단 우리 아이들뿐만 아니라 사람은 누구나 ‘현재의 나이에 걸맞게’ 즐겁고 재미 있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 김태선 <코리아 타운> 대표. 1956년
생. 한국 <여원>
<신부> <직장인> 기자
및 편집부장, <미주 조선일보> 편집국장. 2005년 10월 1일 <코리아
타운> 인수, 현재 발행인 겸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