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이거…” 느닷없이(?) 그녀가 테이블 위로 책 한 권을 건네줬습니다. 82년 겨울, 늘 학교 앞 분식점에서 라면으로 때우던 우리는 모처럼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고 있었습니다. “어? 이거 무슨 책이야?” 저의
물음에 그녀는 조용히 웃었습니다. 책을 열어보니… 거기에는
빳빳한 만 원짜리 한 장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돈으로 저녁 값을 냈습니다. 그리고 ‘남은
돈은 어쩌나?’ 싶었지만… 돌려 주기도 멋쩍고(?) 해서 그냥 제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그 날 이후로 그녀는 저와 데이트할 때마다 그렇게 책 한 권을 건네주곤 했습니다. 책
속에는 예외 없이 만 원짜리 한 장, 어떨 때는 오천 원짜리 한 장이 들어 있었습니다. 어쩌다 미리 책 속에 돈을 못 넣어 놓았을 때는 주위를 살핀 후 테이블 밑으로 돈을 작게 접어서 저에게 쥐어줬습니다. ‘스물 한 살’밖에 안 된 그녀는 그런 방법으로 ‘가난한 늦깎이 대학생 남자친구’의 기를 살려줬습니다. 그러한 그녀에게 저는 늘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고마워, 영은아. 나중에 평생을 두고 갚을 게!” 제 아내 얘기입니다. 요즘에야 연인 사이에도 밥값이나 술값을 서로 나눠
내는 게 자연스럽지만, 그 시절엔 데이트 비용을 남자가 내지 않으면 왠지 ‘쪽 팔리는’ 기분이 드는 그런 분위기였습니다. 때문에 그녀는 자기보다 여섯 살 위인 남자친구의 자존심을 살려주기 위해 그 같은 방법을 찾았던 것입니다. 실제로 아내는 데이트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저를 카운터 옆에 세워 놓고 자신이 돈을 낸 적이 없었습니다. 당시 저는 6년 간의 긴 방황을(?) 끝내고
다시 대학생활을 시작했는데, 사업 실패로 많은 빚을 지고 돌아가신 아버지로 인해 극심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녀 또한 많이 부유한 집 딸은 아니었지만 저보다는 나은 상황이었기에 ‘남자친구
자존심 살려주기’를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늘 라면으로 데이트를
하다가 가끔 농담 삼아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떡라면 먹자!” 라고
하면 즐거워하는 그녀였습니다. 제가 아내를 ‘제 여자’로 마음을
굳히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었습니다. 상대의 입장을 배려하고 생각해주는 마음! 어쩌면 그것은 세상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나중에 후배들이 ‘결혼 상대로 어떤 여자가 좋으냐?’고 물으면 저는 아내와의 이야기를 들려 주곤 했습니다. 무더운 여름 날, 땀 흘리며 회사에서 돌아온 남편이 ‘나 물 한 컵만 줄래?’ 라고 얘기하기 전에 시원한 물 한 컵을 건네주는
아내라면 충분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아내와 저는 우리 아이들에게도 ‘이성과 교제할 때 늘 나보다는 상대의 입장을
먼저 생각 해줄 것’을 당부합니다. 또한 ‘상대의 장점은 물론 단점까지도 잘 볼 것’을 일러줍니다. 데이트 과정에서는 누구나 자신의 장점만을 보이고 싶어하기
때문에 ‘상대의 단점까지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결혼을 결심해야 하고, 그러한 결혼이라야 행복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 김태선 1956년 생. <코리아 타운> 대표. 한국 <여원> <신부> <직장인> 기자 및 편집부장, <미주 조선일보> 편집국장. 2005년 10월 1일
<코리아 타운> 인수, 현재 발행인
겸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