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김 국장… 오… 오랜만이에요…” 밤 아홉 시가 넘은 시각, 자기집
문 앞에 서 있는 우리를 본 신민호 사장은 적잖이 당황한 표정이었습니다. 사장 부인은 “또 올 것이 왔구나” 하는 표정이었고, 올망졸망한 세 아이들은 낯선 방문객을 향해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굴리고 있었습니다. 대궐 같았던 집도, 운전기사가
딸린 최고급 승용차도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일산신도시 열 다섯 평짜리 월세 아파트에
아내와 세 아이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김 국장, 들어오시라는 말도
못 하겠고… 우리 요 앞에 나가서 얘기합시다.” 우리는 들고
간 음료수며 과자가 든 봉지를 아이들에게 건네주고는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하고 씩씩하게 인사하는 아이들을 뒤로 한 채 밖으로 나갔습니다. 1997년의 일입니다. ‘스카우트 비 5천 만원, 연봉 7천
만원, 중형차 한 대’를 조건으로 옮겨갔던 회사가 무리한
사업확장으로 쓰러지는 과정에서 받아야 할 돈을 못 받은 건 물론이고, 회사 재정보증서에 싸인을 했던
탓에 3천 만원 가까운 은행 빚을 떠안게 됐습니다. 안 그래도 1년 반 동안 <여원> 살리기 작업에 앞장서며 월급 한 푼 안 받고 고생한
직후에 겪은 일이었던 지라 그 충격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김 국장, 그리고 부인께 정말
미안하고 면목 없습니다…” 자기 집 근처 작은 까페로 우리를 데리고 간 신민호 사장은 담배 연기를 길게
한 번 내뿜은 후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회사가 그렇게 되고 나서 몇 달 동안은 정말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들이닥쳐서 멱살을 잡고 욕설을 퍼붓고 이것저것 때려 부수고…
물론 모두가 내 잘못에서 비롯된 일입니다만 너무너무 견디기가 어려워 죽어버릴 생각도 여러 번 했습니다. 그러다가도 아직 어린 세 아이들을 보면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그
동안 많은 사람들을 겪었지만 김 국장처럼 점잖게, 더군다나 아이들 과자까지 사 들고 온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정말 고맙고 미안합니다. 언제라고 얘기할
수는 없지만 김 국장 돈은 반드시 제일 먼저 갚겠습니다. 그리고 원금을 상환할 때까지 은행이자는 내가
갚겠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매월 은행이자를 보내왔고 얼마 후 동대문시장에서 의류수출사업을
하면서부터는 상황이 되는 대로 1백만원, 2백만원씩 원금도
보내왔습니다. 그러던 중 2001년 9월 12일, 우리가 시드니
행 비행기를 타기로 돼 있던 날까지 그는 7백 만원을 남겨놓고 있었습니다. 결국 그날 저 혼자 비행기를 탔고, 우리 가족은 신민호 사장으로부터
나머지 돈을 받아 50일 늦게 시드니 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습니다. 집 팔아서 빚 청산하고 남은 돈 7백
만원에 신민호 사장이 힘들게 마련한 7백 만원 등 총 1천 4백 만원으로 우리는 두 아이 1년치 랭귀지스쿨 학비, 중고차, 렌트 본드비를 해결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시드니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정말 ‘피 같은 돈’이었습니다. 지난 화요일(3일)이 우리 가족이 시드니 땅을 밟은 지 만 8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문득, 어려운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해 우리에게 힘을 실어준 신민호
사장 생각이 났습니다. 만일 저도 그때 그의 멱살을 쥐고 흔들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생각
해봅니다. 더군다나 해외로 떠난다는데 속된 말로 “배 째라” 하고 나왔으면 방법이 없었을 겁니다. 어떤 일이든 서로를 이해하며
진심을 주고 받을 때 해결의 실마리는 찾아지는 것 같습니다. ********************************************************************** 김태선 <코리아 타운> 대표. 1956년 생. 한국 <여원> <신부> <직장인> 기자 및 편집부장, <미주 조선일보> 편집국장. 2005년 10월 1일 <코리아 타운> 인수, 현재 발행인 겸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