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숙아, 미안해… “와! 김태선 선생님이다! 선생님!!” 열 세 살짜리 미숙이가 휠체어 바퀴를 힘껏 굴리며 언덕을
내려옵니다. 적잖이 비탈진 길, 자칫 넘어지기라도 할 세라
저도 열심히 언덕을 뛰어 올라갑니다. 그리고 마치 오랜만에 만난 연인처럼 우리는 서로를 얼싸 안습니다. 아기 때 소아마비를 앓은 미숙이는 가끔 클러치를 이용해 조심조심 걷기도 하지만 주로 휠체어와 함께 지냅니다. 워낙 장난꾸러기여서 위험하다 싶을 정도로 휠체어를 터프하게(?) 몰고
앞 바퀴를 번쩍 든 채 묘기를 부리기도 합니다. 그 옆에서는 미숙이보다 한 살 더 위인 미정이가 조용히 저를 보고 미소를 짓습니다. 내성적인 성격의 미정이는 제 손을 꼭 잡고 앉아 있는 걸 좋아했습니다. 저만 보면 쉴새 없이 깔깔대던 승옥이, 저랑
나이가 동갑이라서 ‘노인네’ 라고 불렀던 영자, 엄청 까칠한 성격으로 웬만한 사람들은 다가갈 엄두도 못 냈던 은희, 그리고
새색시처럼 얌전했던 애영이…. 참 많은 세월이 지났습니다. 80년대
초, 저는 학교 근처 봉천동에 있던 삼육재활원에서 야학교사로 활동했습니다. 소아마비, 뇌성마비 등 신체장애를 가진 친구들이 치료와 재활 그리고
공부를 하는 곳이었습니다. 또래의 친구들보다 몇 년씩 늦은 공부를 하고 있는 그곳 친구들에게 여러 대학
학생들이 모여 공부를 가르쳤는데, 저는 영어와 수학을 맡았습니다. 한
사람이 일주일에 두 번 가는 게 원칙이었지만 저는 그보다 훨씬 자주 아이들을 만나러 갔습니다. 일주일
꼬박 그곳에 간 적도 많았습니다. 처음에 그들을 만났을 때, 저는 속으로
흠칫 놀랐습니다.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말도 없고 어둡다던데… 그곳에서 만난 아이들은 너무너무 밝고 활달했습니다. 저의 편견인
듯싶었습니다. 하지만…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그들은
또 다른 모습을 저에게 보였습니다. 자신들이 처한 지금, 그리고
힘들었던 지난 시간들과 밝지 못한 앞날 등을 걱정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한테, 얼마 안 있으면 떠나갈 사람들한테’ 자신들의 속마음을 보이고 싶지
않아 처음에는 그렇게 밝은 표정들을 보인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들이 마음을 열어준 것에 감사하며 정말 오랫동안, 학교를 마치고 결혼을 해서도 제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그 친구들과 함께 하겠노라고 스스로에게 다짐을 했습니다. 하지만 졸업을 하고,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면서 그들을 찾는 횟수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줄어 들었고, 결국
언제부터인가는 그들을 향한 발걸음이 그쳐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저도 그들에게 ‘얼마 안 있으면 떠나갈 사람’이 되고 만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5년도 훨씬 전의 일이니
열 세 살짜리 미숙이도 이제는 40대가 됐겠습니다. 성격
까칠한 20대 초반의 은희는 쉰을 바라보고 있을 겁니다. 지난 수요일, 병마와 싸우는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한 단체의 대표님, 간사님과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아무런
대가 없이 꾸준한 봉사활동을 펼치고 계시는 그 분들을 보며 문득 삼육재활원 친구들에 대한 미안함이 떠올랐습니다. 그 분들과 헤어지면서 이제 제가 다시 그런 자리에 함께 하게 되면 절대로 쉽게
그들 곁을 떠나는 일은 없도록 해야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습니다. ********************************************************************** 김태선 <코리아 타운> 대표. 1956년 생. 한국 <여원> <신부> <직장인> 기자 및 편집부장, <미주 조선일보> 편집국장. 2005년 10월 1일 <코리아 타운> 인수, 현재 발행인 겸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