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한 그녀가 한없이 고마울 따름입니다 “어, 은주야. 벌써 한 시간째 기다리고 있는데 언니가 안 오네?” “그래요? 이상하네. 제가 언니한테 전화 한번 해볼 게요.” 그리고 돌아온 답은 “언니가
깜빡 했대요. 미안하대요”였습니다. 말은 “어쩔 수 없지, 뭐. 다음에 다시 잡으면 되지”라고 했지만 괘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이런 싸가지… 지 동생이 하도 졸라대서 약속을 잡았고 더군다나 지네
동네까지 찾아갔는데 약속을 깜빡 했다고? 참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이번에는 우리
학교 앞으로 약속장소를 잡았고 마침내 첫 만남이 이뤄졌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첫눈에 확 반한다던데 우리는
둘 다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마침 우리 학교 축제가 다가오고 있었고 저는 그 친구를 제 축제파트너로
초대해 축제기간을 함께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게 다였습니다. 그렇게
그녀의 존재를 거의 잊어버린 채 몇 달이 지나던 어느 날, 은주가 저에게 볼멘소리를 했습니다. “아니, 선생님은 무슨 남자가
그래요?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딱 부러지게 얘기를 해야지, 몇 달째 연락도 없이 흐지부지하게 지내는 법이 어디 있어요? 언니는
선생님한테서 연락오기만 기다리고 있는데….” 한쪽 다리가 좀 불편했던 은주는 제가 야학교사로 활동하던 재활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성격이 워낙 밝고 활달해 재활원을 온통 휘젓고 다니는 통에 ‘깡패’라는 별명을 붙여줬고 녀석은 “나한테
예쁜 외사촌언니가 있는데 선생님한테 꼭 소개시켜 주고 싶다”며 한참을 졸라댔던 터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다시 얼굴을 마주했습니다. 피차 죽고 못사는 입장도 아니고 하니 ‘확실한 마무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런데 은주는 지 언니한테 이렇게
얘기를 했답니다. “언니는 사람이 왜 그래? 선생님은 언니가
마음에 드는데 언니 쪽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으니까 계속 눈치만 보고 있단 말이야.” 중학교 2학년밖에 안됐던 은주의
교활한(?) 작전을 알고 나서 우리는 박장대소를 했습니다. 이어
그녀의 고백이 한가지 더해졌습니다. “사실 첫 약속에 안 나갔던 건 처음부터 교육을 시키기 위해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였다.” 헐…
사귀어보니 ‘완전쑥맥’이었던 그녀는 친한 언니들의
충고 같지 않은 충고를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였던 겁니다. 그렇게 못 만날 뻔, 끊어질
듯 다시 이어진 우리의 만남은 결국 ‘운명’으로 바뀌어 ‘희귀동물’이었던 그녀와 ‘멸종동물’이었던 제가 하나가 됐고 어느덧 30년을 훌쩍 뛰어넘으며 하루의 시작과
끝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뭐가 걱정이야? 밥은 전기밥솥이
하고 빨래는 세탁기가 할 텐데”라고 철없는(?) 모습을 보이며
깔깔대던 그녀는 어느덧 맛있는 음식들도 척척 해내고 남편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하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아내’가 돼있었습니다. 결혼 전 양쪽 집의 극심한 반대로 눈물바람도 많이 했던 그녀는 결혼 후에도
‘외아들에 홀 시어머니’를 모시느라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남편이 가진 기자라는 직업의 특수성 때문에, 나보다는 남을 더 생각하는
남편의 찌질한 생활방식 때문에 숱한 고생도 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항상 웃는 얼굴에 초긍정
마인드로 일관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저를 아내 사랑이 대단한, 좋은
남편으로 생각하시지만 사실은 그 동안 그녀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시드니에 와서는 제가 해줄 수 있는 건 다해주려 애를 쓰고 있을 뿐입니다. 지난 수요일 ‘그녀의 결혼기념일’에도 그녀는 특별한 선물도 없는 장미꽃바구니와 사시미, 스시에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그녀가 저는 한없이 한없이 고마울 따름입니다. ********************************************************************** 김태선 <코리아타운> 대표. 1956년 생. 한국 <여원> <신부> <직장인> 기자 및 편집부장, <미주 조선일보> 편집국장. 2005년 10월 1일 <코리아타운> 인수, 현재 발행인 겸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