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줄 알았더라면… 정말 이럴 줄 알았더라면 좀더 자주 뵐 걸 그랬습니다. 아니, 연초에 지인을 통해 연락을 주셨을 때 밥 한끼라도 함께 했더라면
좋았을 뻔했습니다. 지난해 생신 날, 제가 보내드린
난을 받아 들고는 “안토니오, 이거 정말 내 주는기가?” 하며 살짝 달떠 있었던 수화기 너머의 사모님 목소리가 지금도 기억에 선합니다. 2년 전, 모처럼 식사를 함께
하는 자리에서 사모님은 “안토니오, 니 줄을 잘 서야 한데이. 회장님만 양아버지라고 챙겨드리고 내는 별 볼 일 없다, 이거 아이가?” 하며 웃으셨습니다. 제가 그 두 분을 처음 만난 건 13년
전이었습니다. 호주에 온지 3년도 채 안된 상태에서 비자문제를
포함해 여러 가지 어렵고 힘든 일들이 계속되고 있는 와중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당시 시드니한인성당 연령회장을 맡고 있던 강 회장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세심하게
어머니의 장례절차를 도와주셨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우리 부부는 그 분을 양아버지처럼 모셨습니다. 그 분도 주변에 스스럼 없이 “안토니오는 내 아들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나이차로 따지면 큰형님, 큰누님
정도이겠지만 가족사랑이 그리운 우리 부부는 그 분들을 정말 양부모처럼 여겼습니다. 두 분의 생신이나
명절 때면 짬짬이 작은 선물을 들고 찾아 뵙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그분들은 가족모임에 우리를 끼워 넣고 함께 즐거워했고 당신 자식들한테도
“친형, 친누나처럼 지내라”고
당부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숫기 없는 우리 부부는 ‘가족들끼리
모이는 자리에 우리가 주제넘게 끼는 것 같아서’ 언제부터인가 한 발짝 뒤로 물러서기로 했습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이런 이유와 저런 핑계로 가족모임에는 나가지 않고 어쩌다
두 분과의 만남만 짧게 짧게 가졌습니다. 강 회장님 생신 때마다 예쁜 난을 보내드리는 게 고맙다고 가진
식사자리에서 사모님이 “안토니오, 니 내는 왜 안 챙겨주노?”라고 우스갯소리를 던진 게 재작년이었고 지난해 처음으로 사모님 생신에 난을 보내드린 겁니다. 그런데 그게 단 한 번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지난 수요일 이른 아침, 수화기 너머에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어제 오후에 사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수술도 성공적으로 끝나고 회복도 잘돼 가족 친지들과 이야기도 나누며 퇴원준비를
하고 있던 상황에서 갑자기 상황이 악화됐다는 겁니다. 수요일 저녁, 아내와 함께 빈소를
찾아 연도를 드리고 돌아오는 길… 생각해보면 참 무심했다는 생각에 회한이 몰려왔습니다. 아무리 한 발짝 물러서 있는다고는 했지만 저는 사모님이 병원에서 큰 수술을 받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두 달쯤 전에도 가까운 지인을 통해 ‘식사
한번 같이 하자’는 전갈을 보내왔음에도 “네, 조만간 찾아 뵙겠다고 전해주세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다시는 그 분을 뵙지 못하게 된 겁니다. 이제 다음 주쯤에 있을 장례미사에도 참석하고 간간이 묘소에도 들르겠지만
함께 할 수 있을 때 더 많은 시간을 갖지 못한 게 못내 안타깝고 죄스럽게 여겨집니다. ‘언젠가는’ 혹은 ‘조만간’이라는 단어는 참으로 위험한 것 같습니다. ‘지금 바로’가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입니다. 눈물이 가득 고인 채 사모님 영정을 바라보던 수요일 밤의 강 회장님 모습은 유독 가늘고 여려 보였습니다. 이제 ‘한 발짝’의 거리를 조금 좁혀서 틈틈이 그 분을 찾아야겠습니다. 좋은 사람들, 고마운 사람들과는 기회가 있을 때 자주 함께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 김태선 <코리아타운> 대표. 1956년 생. 한국 <여원> <신부> <직장인> 기자 및 편집부장, <미주 조선일보> 편집국장. 2005년 10월 1일 <코리아타운> 인수, 현재 발행인 겸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