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놈의 인터넷… 1990년대 초, 한국에 ‘천리안, 하이텔, 나우누리’라는 게 있었습니다. ‘삐…’ 하는
힘겨운(?) 연결음과 함께 시작되던 PC통신 3인방인데 당시에는 이를 통해 온라인 채팅도 하고 동호회 활동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가히 인터넷의 원조 격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 귀여운(?) 수준이었습니다. 이후 인터넷에 관한 한 ‘날아다니는’ 수준을 지녔던 한국은
1990년대 말에는 ADSL까지 도입돼 인터넷 강국의 면모를 과시했습니다. 하지만 2001년 9월, 시드니에 처음 와서 저는 ‘삐…’ 소리를 다시 들어야 했습니다. 세계적인 선진국 호주에서 10년 전쯤에나 썼을 법한 인터넷 전화선 모뎀을 여전히 사용하고 있었던 겁니다. 인터넷 속도가 느리고 답답한 것은 물론,
모뎀 한 개에 컴퓨터 한 대만을 쓸 수 있었고 인터넷을 사용하는 동안에는 전화나 Fax를
못쓰는 불편까지 감수해야 했습니다. 지금이야 호주도 ADSL 2+에
이어 NBN 작업까지 진행되고 있지만 당시로서는 참 답답하고 이해가 안가는 모습이었습니다. 인터넷은 오래 전부터 우리에게 물이나 공기 같은 존재가 돼버렸습니다. 평상시에는 별다른 느낌 없이 달고(?) 살지만 막상 인터넷이 없어지면
여간 답답하고 불편한 게 아닙니다. 이른바 ‘멘붕’ 상태가 돼버리는 겁니다. 3주전 금요일 아침, 우리 집
전화와 인터넷이 동시에 먹통이 됐습니다. 웬일인가 싶어 모뎀도 여러 번 껐다 켜보고 별 짓을 다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아들녀석이 TPG에 연락을 해보니 ‘텔스트라 라인에 문제가 생겼다’는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더 기가 막힌 건 ‘텔스트라에
부킹이 꽉 차서 6월 19일에나 인터넷 연결이 가능할 것
같다’는 이야기였습니다. 한국 같으면 당장 한두 시간 내에
달려와서 해결할 문제를 3주 후에나 해주겠다는 겁니다. 아무리
매사에 느긋한 나라라지만 이건 도대체가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저 참고 기다리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인터넷이 없어서 생기는 불편은 정말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당장
인터넷이 안 되는 탓에 실시간으로 돌고 있던 우리 집 한국TV가 멈춰 서버렸습니다. 회사에서보다 집에서 일하는 시간이 더 많은 저로서는 당장 업무에 막대한
지장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저런 파일들을 USB에
담아와 밤 늦은 시간까지 작업하다 보면 답답한 게 여기저기에서 툭툭 튀어나왔습니다. 혹시나 싶어 하루에도 몇 번씩 모뎀을 껐다 켰다 해봤지만 우리 집 인터넷은
변함 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2주를 꽉 채우고 3주째로 넘어가던 월요일 아침, 출근준비를 서두르는데 아들녀석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아직 TPG에서 공식적인 연락은
못 받았지만 우리 집 전화라인이 살아난 것 같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때부터 아들녀석과 함께 ‘우리 집 인터넷 살리기’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한 시간 가까이 아들녀석과 모발폰으로 통화를 하며 원격작업을 진행한 끝에
드디어 우리 집 인터넷이 살아났습니다. 예정일보다 ‘자그마치’ 4일이나 앞당겨진 겁니다. 다시 우리 집에서 실시간 한국TV 소리가 나고 그 동안 들고 다니던 USB도 제자리를 찾았습니다. 인터넷 연결을 마치고 TPG에
연락했더니 ‘알려줘서 고맙다’며 ‘인터넷을 못쓴 17일 동안의 비용을 크레딧 처리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해줄 수 있는 건 그게 전부였습니다. 그 동안 우리가 겪은 불편과 손해는 전혀 고려대상에 들어가지 못하는 겁니다. 한국 사람들이 빨리빨리 문화에 익숙해 매사에 급하다고는 하지만 인터넷 수리를
위해 3주 가까이 기다려야 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 부분에서는 호주도 조금은 빨라져야 할 것 같습니다. ********************************************************************** 김태선 <코리아타운> 대표. 1956년 생. 한국 <여원> <신부> <직장인> 기자 및 편집부장, <미주 조선일보> 편집국장. 2005년 10월 1일 <코리아타운> 인수, 현재 발행인 겸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