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라는 놈은… ② “Taesun My Son, My First
Son!” 지금은 고인이 되신 우리학교 영문과 로버트
해롤드 (Robert F. Herold) 교수가 저를 부둥켜(?)안고
등을 두드리며 입버릇처럼 되뇌던 이야기입니다. 미국에서 오랜 세월 교단에 서다가 제가
2학년 때 우리학교에 온 이 노교수는 처음 접하는 한국문화 그리고 미국학생들과는 다른 한국학생들에게서 많은 정을 느꼈습니다. 우연찮은 기회에 해롤드 교수와 친해지게 된 저는 한글을 배우고 싶어하는
그의 한글 교사가(?) 됐고 얼마 후 그가 우리학교 영자신문
(English Newspaper) 영문간사 (English Advisor)가 되면서부터는
함께 하는 시간이 부쩍 많아졌습니다. 천생 교육자였던 해롤드 교수는 학생들을 좋아해 영문과는 물론 다른 과 학생들과도
허물없이 지냈습니다. 그리고 아주 가까운 학생들 몇몇은 ‘아들’이라 부르며 캠퍼스 안에 있는 자신의 사택에 자유롭게 드나들도록 했습니다. 사석에서는
‘Professor Herold’ 대신 ‘Papa’라 부르라고
했습니다. 해롤드 교수는 저에게 ‘First Son’이라는
애칭을 줬습니다. 자신의 많은 아들들 중 ‘가장 먼저 생긴
아들이고 가장 좋은 아들’이라는 의미를 담은 단어였습니다. 이렇게 몇 년을 해롤드 교수와 붙어 지내다 보니 정말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생겼습니다. 저의 영어회화 실력이 깜짝 놀랄 만큼 늘어 있었던 겁니다. 저의 이 자랑스런(?) 영어실력은 훗날 기자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아주 오랫동안 저를 ‘영어 잘하는 김 기자’로 통하게 만들어줬습니다. 실제로 회사에 외국인이 나타나면 무조건 김 기자를 찾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영어를 잘 하는 또 하나의 비법은(?) 용감해지는
것이었습니다. 해롤드 교수와 가깝게 지내며 영어회화가 늘어나는 것과 동시에 저는 우리 과 외국인 교수들은
물론 다른 과 외국인 교수들과도 많은 접촉을 가졌습니다. 다른 대학 영자신문사와의 교류도 잦았던 터라 외부에서도 외국인들과 자리를
함께 하는 경우가 많았고 해롤드 교수의 친지나 미국인 제자들이 학교로 찾아오는 경우도 많아 그들과의 만남 또한 빈번했습니다. 사람 마음이 참 묘해서, 그리고
그때는 혈기왕성하던 시절이었던 터라 영어울렁증도 외국인공포증도 저에게는 없었습니다. 물론, 네이티브 스피커가 아닌 데에서 오는 한계점은 분명히 있었겠지만 어지간한 대화는 거침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한동안 영어라는 놈과 친하게 지냈지만 저의 영어실력은 어느 시점부터
정체상태 혹은 점점 줄어드는(?) 단계를 맞고 있었습니다. 대학
때처럼 영어를 일상화하는 일도 없었고 영어 자체를 쓸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외국어는 자꾸
써야 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12년 전, 시드니에 처음 왔을
때는 온통 영어로 된 도로표지판이 낯설기만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그 표지판들이 한글처럼 친숙하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City, Strathfield, Eastwood 이런 것들이 시청앞, 종로, 압구정동처럼 받아들여진 겁니다. 시드니에 살고 있지만 영어보다는 한국어를 중심으로 생활하고 있는 터라 언제부터인가
저에게는 다시 외국인공포증, 영어울렁증이 생겼습니다. 저보다
영어를 잘 하는 아들녀석과 딸아이가 있다는 사실도 저의 영어를 퇴색하게 하는 요인이 됐습니다. 급할 때야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긴 하지만 영어라는 놈은 역시 원어민들과
좌충우돌하며 거침없이 들이대고 헤쳐나가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새삼스럽습니다. ********************************************************************** 김태선 <코리아 타운> 대표. 1956년 생. 한국 <여원> <신부> <직장인> 기자 및 편집부장, <미주 조선일보> 편집국장. 2005년 10월 1일 <코리아 타운> 인수, 현재 발행인 겸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