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복부인?! ② 그렇게 해서 산 열아홉 평짜리 아파트는
3년쯤 살다가 4천 5백만원에 팔았습니다. 2천 2백 60만원에
샀으니 두 배로 불어난 겁니다. 전세보증금 9백만원을 들고
시작한 아내의 내 집 마련 작전은 말 그대로 ‘대박’을 쳤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당시 한창 열풍을 일으키고 있던 수도권 5대 신도시 바람을 타고 우리로서는 꿈에서나 그릴
법했던 서른 두 평짜리 궁전(?)같은 신축아파트를 산 겁니다. 아파트를 선택하는 데도 우리는 신중에 신중을 거듭했습니다. 내로라 하는 건설회사들이 저마다 화려한 모습의 모델하우스를 놓고 고객들을 유혹(?)하고 있었지만 우리는 현대아파트와 동신아파트를 최종후보에 올렸습니다. 현대아파트가 전철역과 아주 가깝게 있기는 했지만 아파트 잘 짓기로 소문난
동신아파트는 전철역과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으면서도 바로 길 건너로 9만 평짜리 중앙공원을 두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입주하고 얼마 안돼 중앙공원 옆에는 시청 청사가 들어섰고 엘지백화점, 까르푸, 순천향의대부속병원 등이 잇달아 생겼습니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아파트 단지 바로 옆에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가 나란히 붙어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아내는 그런 것까지도
면밀하게 계산하고 동신아파트를 골랐던 겁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우리 아파트 값이 가장 비싸진 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호주에서의 첫 집은 이스트우드에서 조금 떨어진, 뒷마당에 커다란 수영장이 있는 9백 30스퀘어미터짜리 하우스였습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2년 반 남짓 동안을 지내면서 이스트우드 진입계획을 차근차근 진행했고 아내의 기지는 또 한 번 발휘됐습니다. 이왕이면 ‘좋은 집’을 갖고 싶어 1백 군데쯤 인스펙션을 다녔지만 그럭저럭 마음에 드는
집은 적게 잡아도 90만불은 줘야 가능했습니다. 우리가 즐겨
쓰는 ‘감당할 수 있는 무리’를 훌쩍 뛰어넘는 선이었고 잠시
고민하던 아내는 눈높이를 조금 낮춰 지금의 우리 집을 택했습니다. 한동안 잠잠하던 집값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하던 시점이라서 그때 붙잡지 않았더라면 더 높은 금액을 줘야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이후 우리 집은 두 차례의 리노베이션을 거쳐 처음 살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의 거의 새 집으로 변신했고 세 달 전에는 집 뒤쪽 중간마당 전체에 거실의 두 배가 넘는 크기의 데크를 만들었습니다. 주방시설을 갖춘 널찍한 파골라까지 세워놨고 아내는 주변에 분수를 만들고 조명을 설치하고 이것저것 예쁘게 꾸미느라
한동안 분주했습니다. “와! 이젠 밀리언 넘겠네요!” 우리 집에 놀러 온 사람들이 종종 하는 이야기입니다. 어차피 ‘이 집에서 늙어 죽을 때까지 사는 걸로’ 마음 먹고 여기저기를 다듬었기
때문에 집값이 오르든 말든 크게 상관은 안 하지만 기분만은 확실히 좋습니다. 그리고 7월 14일, 우리는 또 하나의 집을 샀습니다. <코리아 타운>이 6년여
동안의 셋방살이를 청산하고 내 집 마련을 한 겁니다. 웨스트 라이드 스테이션 바로 옆 10층짜리 주상복합건물 Level 1에 오피스 1백 30스퀘어미터와 주차장·창고
74스퀘어미터까지 총 2백 4스퀘어미터를 샀습니다. 마침 돌아오는 월요일 (8월
6일)이 <코리아
타운> 창간 13주년 기념일이라서 내일 오후에는 <코리아 타운> 가족들이 우리 집에 모여 창간 13주년과 새 사무실 구입을 자축하는 조촐한 파티를 갖습니다. <코리아
타운>이 새 사무실에서 또 한 차례의 도약을 할 수 있도록 변함없이 성원하고 사랑해주시는 애독자님들, 광고주님들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드립니다. ********************************************************************** 김태선 <코리아 타운> 대표. 1956년 생. 한국 <여원> <신부> <직장인> 기자 및 편집부장, <미주 조선일보> 편집국장. 2005년 10월 1일 <코리아 타운> 인수, 현재 발행인 겸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