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내가 하던 걸 니가 하냐?” 하프라인 근처 한국진영에서 공을 잡은 차두리가 폭풍질주를 시작합니다. 기겁을 한 우즈벡 수비수가 사력을 다해 쫓아보지만 역부족입니다. 그는 차두리를 잡으려는 듯, 밀쳐버리려는
듯 손을 허우적대보지만 이미 차두리는 저만치 앞서 가 있습니다. 그렇게 차두리를 놓친 우즈백 수비수는
그 자리에 멈춰 멍한 얼굴로 차두리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동안 차두리는 또 한 명의 우즈벡 수비수를 제쳤고 골문 가까이에서 앞을
가로막으려는 두 명의 수비수마저 여유롭게 따돌립니다. 차두리가 손흥민의 왼발에 정확히 공을 찔러주고
이내 우즈벡의 골망이 출렁입니다. 어떤 매체는 50미터를, 또 다른 매체들은 60 혹은 70미터를
달렸다고 했습니다. 어찌 됐거나 빛의 속도로 ‘원맨쇼’를 벌인 차두리가 ‘차미네이터’ 혹은
‘로봇’이라 불리는 건 다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였습니다. “야, 내가 하던 걸 니가 하냐?” 우즈벡을 2대 0으로
꺾고 4강 진출이 확정된 후 걸려온 아들 차두리의 전화에 아버지 차범근은 이렇게 첫마디를 던졌다고 합니다. 우즈벡 선수들을 주렁주렁(?) 달고
‘사람인 듯 사람 아닌’ 모습으로 폭풍질주 하는 차두리의
모습에서 현역시절 ‘그라운드의 갈색 폭격기’로 일컬어지던
‘차붐’ 차범근의 모습이 오버랩 됐습니다. ‘내가 하던 걸 니가 하냐?’ 아버지로서는
더 이상의 표현이 필요 없었을 듯싶습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들 차두리에 대한 각별한 사랑이 넘치는 아버지 차범근이 쓴 글의 일부를 공유합니다. 세월의 빠름을 실감하고 있다. 두리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 프랑크푸르트 신문들이 ‘Zweite Chaboom’이 태어날 거라면서 스포츠 면을
가득 채웠던 기억이 엊그제 같은데 두리가 벌써 국가대표 유니폼을 벗는다고 한다. 두리보다는 내가 더
아쉬운 것 같다. ‘국가대표선수 아들’은 나에게 정말 큰
자랑이었다. 사람들은 아버지인 나와 비교하느라 두리한테 만족하지 못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차붐의 아들’은
팬들에게는 아쉬움이고 두리에게는 짐이었다. 그러나 나에게 두리의 존재는 ‘감사와
행복’ 그 자체였다. 아내는 늘 얘기한다. ‘당신한테 두리 같은 좋은 아들을 선물한 것만으로도 나는 당신에게 할 일을 다 한 것’이라고…. 절대적으로 맞는 말이다. 축구. 나는 두리가 은퇴를 안하고
오래오래 축구선수였으면 좋겠다. 아버지가 운동장에 가서 아들이 축구 하는 것을 보는 즐거움을 두리는
아직 모를 것이다. 또 아들이랑 축구 얘기를 할 때마다 느끼는 그 뿌듯함은 아들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할 수 없는 기분이다. 이제는 나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진 두리가 세계 축구를 자유롭게 얘기하면서
전술적 논리를 펼 때면 든든하고 자랑스럽고 뿌듯하고 갖가지 감정이 다 섞여 나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노인으로 만들어준다. 두리가 대표선수가 되고 1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사람들은 대놓고 나보다 두리를 더 좋아하게 됐다. 예전에는 그나마 어른들은
내 편이었는데 이제는 아줌마들도 두리 편이다. 어디를 가도 두리를 더 보고 싶어한다. 아내도 차범근 아내보다는 두리 엄마로 불리기를 더 바란다. 나도 이제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꼬마들에게 ‘내가 차두리 아빠다’라고 스스로 소개한다. 이제 며칠 후면 내 인생의 자랑거리 하나가 과거 속으로 들어간다. 아쉽고
고맙고 미안한, 복잡한 마음이다. 두리가 내 인생의 가장 큰 축복이라고 말하면 아내가 섭섭하겠지? 고쳐서 말해야겠다. ‘두리는 아내가 나에게 준 내 인생의 가장 큰
축복’이라고…. ********************************************************************** 김태선 <코리아타운> 대표. 1956년 생. 한국 <여원> <신부> <직장인> 기자 및 편집부장, <미주 조선일보> 편집국장. 2005년 10월 1일 <코리아타운> 인수, 현재 발행인 겸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