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해 보면 미술관을 가거나 그림을 감상하는 활동은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해본 것 같다. 그림에 소질이 없어서인지 환경이 그림과 가깝지 않아서인지 모르겠지만 그림과는 먼 생활을 해왔다. 그래서 누가 예술적 감성이 부족하다고 말한다 해도 부정하거나 부끄럽게 생각지 않는다.
이러한 얄팍한 배경 때문에 인문학모임에서 선정한 책 (아트인문학-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법)의 제목을 알게 되었을 때 선뜻 내키지 않았다. 모임에서 하는 독서토론이 처음이고 인문학에 관심 있는 회원들은 어떻게 독후감을 공유하는지에 대한 강한 호기심이 없었다면 결단코 이 책을 읽지 않았을 것이다. 정 내키지 않는다면 뒤늦게 교양을 높이는 의미에서 책에 실린 명화만이라도 눈에 익히자 하는, 별 기대 없이 책장을 펼쳤다.
반전이었다. 프롤로그에서 보여준 김태진 작가의 의도와 인문학적인 안목은 책에 대한 강한 기대감을 불러 일으켰고 미소가 지어지게 했다. 프롤로그의 강한 흡인력이 없었다면 1장에서 설명하는 원근법의 원리를 읽을 때 치밀어 오르는 짜증과 집중력의 부족을 이겨내지 못하고 책을 덮고 말았을 것이다.
그림은 화가가 살아가는 시대를 보여줄 뿐 아니라 그 시대 안에서 분투했던 화가의 내면, 더 나아가 영혼을 보여준다고 한다. 한 장의 그림에서 시대를 알 수 있다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화가의 영혼을 읽을 수 있다는 점에는 고개가 갸웃했다.
시대가 지나며 미술의 패러다임은 변해갔다. 작가는 그 변화를 이끈 테크닉과 그림에 대한 바뀐 이해도를 그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와 그림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언젠가 읽던 소설 속 주인공의 직업이 그림복원가였다. 특히 종교화에 대한 열정이 소설에 깊이 묘사되어 있어서 그가 복원 중이라던 그 종교화를 인터넷에서 찾아본 적이 있었다.
그 주인공이 느끼는 신성함이나 아름다움은커녕 조잡하고 우스꽝스러운 구도에 비웃음이 났었다. 이런 그림에서 하나님의 신성함을 느낀다는 주인공의 묘사를 보며 소설의 설정 중 하나라며 실망했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며 그러한 그림이 그려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고 나자 다음에 종교화를 볼 기회가 주어진다면 비웃음이 아닌 그 시대를 이해하는 눈으로 감상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림에 대한 이해가 조금은 생긴듯한 착각에 뿌듯함이 일었다.
캔버스의 등장과 산업발전으로 인한 물감의 진화, 화가들의 인간 몸에 대한 탐구심의 고취, 자연과 일상에 대한 더 넓은 이해는 화가들의 표현의 욕구를 증폭시키며 서양미술사의 변화를 이끌었다. 천재성을 가진 화가들은 그 시대에 보편화된 화풍을 좇아 자신들의 재주를 펼쳤지만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천재성을 가진 화가들에 의해 새로운 화풍이 생겨났다.
새로운 시도는 어느 기간 동안 마이너리티로 취급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보편화되며 뛰어난 화가들의 추앙을 받는 주류가 된다. 또다른 천재화가에 의해 새로운 화풍이 탄생하기 전까지 이러한 패턴은 중세시대에서 우리시대까지 500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반복돼왔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를 이끈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날카로운 통찰력을 가진 화가들은 미술의 판을 뒤집기 위해 처절한 저항을 해야 했다. 그들이 겪어야 했던 어려움과 좌절들은 그림 한 장 뒤에 가려져 있지만 생각해 보면 엄청난 경험이었으리라. 그들은 역경에 굴복하지 않고 영혼의 도약을 위해 그들의 통찰력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을 멈추지 않았고 더 나아가 다른 이들도 그러한 통찰에 동참하도록 만든 것이다. 그리하여 서양미술이라는 커다란 밤하늘에서 지금도 반짝이는 별들로 빛나고 있는 것이다.
서양미술사를 시대와 영혼이라는 주제로 풀었던 작가는 우리의 삶 또한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말하며 묻고 있었다. 우리의 삶이 시대에 끌려가고 있는지 아님 시대를 이끌고 있는지를. 작가는 무기력하게 시대가 정해준 삶을 살아가기 보다는 공부와 독서를 통해 통찰에 이르렀고 지금은 영혼에 즐거움을 주는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의 질문은 오랜 시간 나의 생각을 붙잡았다. 시대에 지배당하지 않는 삶이란 무엇일까. 시대를 이끌 만큼의 재능을 가지지 못했지만 시대의 거대한 흐름에 휩쓸리지 않으며 살아가는 나의 영혼에 맞는 삶의 방법은 무엇일까.
아트인문학 책은 초등학생보다 못한 미술에 대한 지식을 넓혀 주는데 도움이 되는 책이었다. 그에 더해 나의 삶을 돌아보게 만든 면에서 인문학적으로도 가슴에 남는 책이었다. 언젠가 눈길을 사로잡는 그림을 만나게 된다면 생각하리라. 작가가 약속장소로 가던 길에 마주한 낯선 한 장의 그림에 매료되어 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바라보다 약속시간에 늦었지만 그 우연의 행운에 행복했었다는 일화를. 그리고 작가가 보았던 보이지 않는 것을 나 또한 찾으려 노력하리라.
글 / 데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