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

“어떡하냐 죽어버린 것을” 훌쩍거리는 아이가 안쓰러운 듯 아버지는 조심스럽게 한마디 내뱉는다. 흐린 눈으로 올려다본 하늘은 속절없이 서러워졌다.

 

“우리 집 강아지는 복슬강아지 학교 갔다 돌아오면 멍멍멍” 동요를 부르며 놀던 시절이었다. 어느 날 막 눈을 뜨기 시작한 초콜릿 색의 강아지 한 마리가 나에게로 왔다. 서울에 살고 있는 아버지 친구분이 키우던 코카 스패니얼 (Cocker Spaniel) 개가 6마리 새끼를 낳았다며 새끼 한 마리를 선물로 주셨다. 동네 아이들과 고무줄놀이에 바쁜 누나와 이미 어른처럼 보이는 10살 많은 형은 강아지에게 별 애정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 작고 연약한 털북숭이에게 연민을 느꼈다. 축 늘어진 귀와 곱슬곱슬한 털, 뒤뚱거리며 걷는 모습을 관찰하는 것이 만화책을 보거나 친구들과 구슬이나 딱지 치는 것보다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누가 언제 그 강아지 이름을 붙였는지 모르지만 다스(Das)라 불린 걸 보면 누나와 나는 아니다. 첫날 밤새워 울던 것이 내 품에 파고들어 킁킁 냄새를 맡다 잠이 드는 데 익숙해지자 어미를 찾는 것도 멈추었다. 사랑의 힘은 놀라웠다. 가루우유를 미지근한 물에 타서 먹이는 일과, 자신이 살아있는 동물이라는 것을 항변하듯 여기저기 야무지게 싸대는 똥을 따라다니며 치는 일은 내 몫이 되었다. 신기하게도 더럽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학교에서 지쳐서 집으로 돌아오면, 멀리서 꼬리를 흔들며 달려와 가슴에 안겨 아이스크림 먹듯이 내 얼굴을 핥았다. 그날 들었던 꾸중이나 친구들과 기분 나빴던 일은 금세 잊혔다.

 

개를 키운 적이 있다면 생각보다 수월하게 개와 소통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다스와 나는 말 대신 눈빛, 입, 귀, 코, 꼬리로 소통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인간 언어와 다르게 직관적이고 진실했다. 인간과 개가 함께 살아온 1만 4000년 이상의 시간 동안 어떻게 개들이 사람들이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는지 신기하다. 가혹하고 험한 자연환경에서 함께 살아남기 위해 서로 협조한 인간과 개의 종(種) 초월적 상호작용은 안쓰럽기 조차하다.

 

집에 두고 온 강아지에 대한 설렘과 불안한 마음으로 점심시간에 짬을 내 집에 들렀다. 집이 학교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어 가능했다. 그런데 어느 날 반갑게 맞이해줄 강아지는 나무판자로 만든 제집 옆에서 자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코와 눈 주변에 파리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고 흔들어 깨워도 움직이지 않았다. 저녁에 집에 돌아온 아버지께서 다스는 죽었다고 했지만, 나는 다스가 조만간 잠에서 깨어날 것만 같았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예수나 신데렐라 이야기 그와 비슷한 동화나 만화 속 주인공들을 충분히 많이 알고 있었다. 다스의 죽음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형이 찬물을 끼얹었다. “지금까지 이 세상에 죽었다 살아난 것은 단 하나도 없어. 네가 알고 있는 것은 모두 동화 속 이야기일 뿐이야.”

 

그날은 집집마다 쥐약을 놓는 ‘전국 쥐 잡기 운동의 날’이었다.

 

무조건적 사랑 그 자체가 하나님이라면, 개는 하나님이었다. 인간보다 인간을 더 신뢰하는 개와 함께 뒹굴고 뛰놀던 어린 시절 3년 6개월의 삶은 이렇게 끝났다. “최고의 시간이자 최악의 시간이었다. 지혜의 계절이자 어리석음의 계절이었다. 믿음의 세월이자 의심의 세월이었다. 빛의 계절이자 어둠의 계절이었다. 앞에 모든 것이 있으면서 앞에 아무것도 없었다.”

나의 어린 시절 시간과 계절이 그러했다.

 

그것은 어린 마음에 오래 남겨질 암각화 같은 상처였다. 사람과 사물에 대한 그리움이 들게 될 상황을 미리 경계하게 될 거라는….

 

 

양지연 (캥거루문학회 회원·한국 카톨릭의대 연구전임교수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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