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그 상상의 유혹

10월이 되자 사람들은 차츰 안도하기 시작했다. 기승을 부리던 열대야가 물러가고 바람이 한결 시원해졌기 때문이다. “이제야 가을이 온 것 같습니다…”

그 즈음이었다.

갑자기 들려온 한국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은 구름 위를 걷는 듯, 꿈인가 생시인가… 다시 설레어 잠 못 들게 하였다. 그러나 며칠 후, 수상작들의 내용이 불쾌하다는 차가운 감정들이 끓어 오르기 시작했다.

무엇이 문제일까?

내 조국의 치부를 전세계에 공표한 분노일까, 아니면 정부 공권력에 의해 무너진 약자의 아우성을 끝까지 숨기고 싶었던 속내 때문이었을까. 그도 저도 아니면 그 동안 탄압했던 좌파로 불리는 진보주의자의 수상이 불편했던 것일까? 세계의 시선들도 대한민국을 향해 고개를 갸우뚱해 한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갑자기 좌익 노벨상 수상 작가였던 ‘주제 사라마구 (Jose Saramago)’가 소환되고 관심을 끌었다. 주제 사라마구… 그는 누구인가?

1998년 ‘수도원의 비망록’으로 95번째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그는 포르투갈의 소설가이자 언론인이었다. 가난한 농부의 집안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마치고 용접공, 공무원, 번역가, 평론가, 신문기자, 잡지사와 출판사 편집위원 등 여러 직업을 거쳤던 흙수저였다.

1947년 첫 소설 ‘죄악의 땅’을 발표했으나 그때는 우파 독재자 시절이었기에 그는 창작보다는 정치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다고 한다. 이후 포르투갈은 1974년 4월의 민주화 혁명 (카네이션 혁명)을 통해 안정을 찾았고 그의 창작활동은 민주주의의 토양에서 거침없이 발현되었다.

그가 더욱 특별했던 점은 그의 대표작 ‘눈먼 자들의 도시’ (1995)는 73세에, ‘도플갱어’ (2003년)는 81세에 발표한 작품이라는 것이다. (88세 사망) ‘바닥에서 일어서서’ (1979년)와 ‘수도원의 비망록’ (1982년) 그리고 ‘돌 뗏목’ (1986년) 등의 작품은 25개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20세기 현대문학의 거장으로 손꼽혔다. 일찍이 예술의 씨앗을 품었던 그에게 억압과 독재는 예술의 꽃을 피울 수 있는 토양이 못 되어 주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화제가 되었던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 내용을 살펴보자. 어느 날 오후, 앞이 보이지 않는 한 남자가 차도 한 가운데서 차를 세운다. 그 후 그를 집에 데려다준 남자도, 그를 간호한 아내도, 남자가 치료받기 위해 들른 병원의 환자들도, 그를 치료한 안과의사도 모두 눈이 멀어버린다. 갑자기 뿌옇게 흐려지며 앞이 보이지 않는 이상현상으로 눈먼 자들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정부는 그들을 병원에 격리수용하고 세상의 앞 못 보는 자들을 모두 한 장소로 모이게 한다.

안과의사인 남편을 둔 주인공 아내는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을 지키기 위해 눈먼 자들처럼 행동하면서 충격 속에 정부가 마련한 수용소 현장을 경험한다.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 먹기 위해 아우성치며 배설하는, 이성까지 잃어가는 인간이 아닌 동물들의 돌발행동들의 표현이 눈길을 끈다. 남편은 눈이 멀지 않은 아내의 헌신적인 도움과 사랑을 팽개치고 아내도 눈이 멀어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하고 검은 색안경을 쓴 여자 매춘부를 더듬어서 즉각 간통을 한다.

과연 이런 상황이 되면 인간의 사회적 도덕과 관습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물론 눈먼 자들이나 정부, 모두 풍자적이고 상상의 세계이지만 우리의 현실은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러한 ‘논리적 허구’는 독자를 당혹하게도 하지만 문학은 개인과 시대성 그리고 현실과 허구를 가로지르며 경계 없는 독특한 세계를 구축해왔다. ‘인간은 얼마나 나약하고 결핍된 존재인가’ 하는 명제는 어느 시대에서든 변함이 없는 것 같다.

소설은 원래부터 그러한 대중적 장르로 시작되었다. 소재에 의한 종류 중에 환상 (판타지) 소설이나 미스테리 (공상) 소설에 대한 분류 또한 포함되어 있다. 소설은 시대성이 결여되었다고 해도, 시대성을 소환해왔어도 소설이다. 그것이 창작이며 소설적 진실성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다. 그렇게 예술에 대한 독자의 암묵적인 동의는 이성적인 논리와 비이성적인 논리를 동시에 포괄하며 결과는 ‘감정이입’으로 귀결된다.

독자들은 자신의 이해를 뒤집는 새로운 경험, 감동, 만족, 아픔 등의 감정을 가로지르는 ‘카타르시스’를 원한다. 한강 작가의 작품 역시 역사적 사건을 통해 인간의 나약함, 약자의 아픔, 사회적 모순들을 지적해주고 있다. 그 점을 높이 평가한 스웨덴 한림원은 그녀의 소설을 2024년 세계 최고의 작품으로 인정해주었다.

작가이든, 그렇지 않든 우리 모두는 문학을 사랑한다. 한강 작가를 제외한 세계 최고의 문호들은 문학 전공자들이 없다. 부유한 환경도 가난한 좌파도 문학에서는 제한이 없다. 나이 또한 창작을 방해하는 조건이 아니라는 점을 작가 ‘주제 사라마구’는 알려준다. 그 점이 우리가 문학을 가까이 둘 수 있는 이유가 아닐까?

독자들은 2024년 노벨상 원작을 우리 모국어로 읽을 수 있게 해준 한강 작가에게 환호한다. 더 이상 국가권력이나 진영논리로 뛰어난 작가를 가두려고 하는 슬픈 편견이 없는 민주주의를 소망해본다. 예술은 영원하다. 훌륭한 작가를 배출한 우리조국 ‘대한민국’에 감사한다.

 

 

글 / 권은혜 (글벗세움문학회 회원·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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