뱅스타운 (Parramatta-Bankstown) 노선버스를 운전할 때다.
매주 목요일 이른 아침이면 바스힐 (Bass Hill)주변에서 승차하는 30대 여성 단골승객이 있었다.
양손을 좌우로 벌리고 몸을 약간 흔들며 “뱅스타운 가는데 돈이 없다”고 항상 당당하게(?) 말했다.
언제나 슬리퍼와 두 줄무늬 회색 반바지에 검은 티셔츠를 입고 물병을 하나 들었는데, 운전석에 앉은 내 눈을 빤히 쳐다보며, 뻘쭘히 서서 내 대답을 기다린다.
내가 왼손 엄지를 세우고 안쪽을 가리키며 흔들면, 말없이 그냥 들어갔다. ‘쏘리’도 ‘땡큐’ 도 없었다.
매일 일정한 시간에 무임승차 출근하는 것을 호주 시내버스운전 11년차에 처음 본 것이다.
승객들 대부분이 그렇지만, 첫 만남에서 그녀 또한 조금 덜 깨끗한 정도라는 생각에 보통 하루에 몇 명 만나는 돈 없는 승객쯤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매주 반복됨을 알게 되면서 “다음부터 돈을 안내면 탈 수 없다” 말했지만 변한 건 없었다.
결국 네 번째 만났을 때 “안 된다” 하자 ‘그런 가?’ 하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즉시 하차하는 것이다.
그리곤 정류장 의자에 멍하니 앉아서 다음 버스가 올 때까지 마냥 기다리는 모습이 들어왔다. 불쾌해하거나 화내는 모습도 없었다.
그 후부터 나는 뱅스타운 주변에서 그녀가 매일 눈에 뜨이기 시작했다.
누군가 다른 운전사들이 태워준다는 것을 곧 알아챈 것이다.
그러니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된 셈이다.
만날 때마다 마음은 불편해지기 시작했고, 결국은 나 또한 편해지기로 했다.
중요한 것은 미안해하거나 감사한 표정도 없고 화내는 표정도 없는 모습을 보면서, 세상물성을 있는 그대로만 보며 감정변화가 없는 그녀를 통해, 희로애락을 초월하여 해탈 경지에 도달한 부처님 모습이라는 생(착)각을 했었다는 점이다.
세상 물성에 따라 변하는 내 고약한 성질이 이 승객한테는 없다는 호감이 올라온 것이다.
편해지기 위해 태워주는 이기심도 보였다.
고맙다고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매사를 내 원함을 위해 애쓰고 발버둥 치면서 “세상을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던가?” 안 되는 것도 ‘그런 가?’하고 편하게 받아들이며, 그냥 적당히 살면 되는 것을….
그녀는 뱅스타운 역 근처에서 주로 좌판을 벌리고 앉아 영업(?)을 한다.
앉은자리 앞에는 ‘I need $20, Today’라는 종이를, 옆에는 담배 한 갑과 라이터 그리고 와인 (or 맥주, 음료)을 진열해놓았다.
불쌍한 표정, 고마워하거나 사정하는 것도 없다.
홀짝거리고, 뻐끔거리며 주둥이를 내밀어 도넛을 만들며 무표정하게 앉아있거나, 길에 퍼질러 누워서 잠도 잔다.
빡빡머리에 깔끔하지도 더럽지도 않은 그런 어정쩡한 옷을 입었다.
가끔은 다른 동료(?)들과 함께 담배를 피우며 혀 꼬부라진 유창한 영어로 하하 호호 깔깔거리며 참으로 유쾌한 모습을 보일 때도 있다.
이럴 땐 승객들로 인해 스트레스 받으며 화내고 짜증내며, 쉬지 못해 졸려서 괄약근과 눈알에 죽어라 힘줘가며 하루 종일 버스 운전하는 고약한 내 삶의 모습과 비교가 되었다.
‘좀 거시기 하지만 저런 생활도 괜찮네!’ 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이민 20년 넘게 원칙에 입각해 따박따박 납세해온 모습도 한 순간 초라하게 느껴졌다.
“삶이란 결국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짧은 한 인생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다 가면 그만인 것을. 사람들은 왜 아웅다웅 할까?
왜 갑자기 정치인들이 살아남으려고 온갖 꼼수와 편법으로 길길이 망가지는 모습이 떠오를까?”
온갖 망상들의 활개와 질문들과 함께….
그래도 그렇지 범부중생이지만 한 가정의 가장이, 최소한의 노력과 책임도 없이 무위도식하는 그녀의 삶을 부러워하다니.
‘아무리 힘들어도 이건 아니다’ 라는 생각이 올라왔다.
잠시 힘들고 지쳐서 흔들렸던, 부지런 하려 노력해온 마음을 다시 잡았다.
순박한 아내와 어린 자식들의 귀여웠던 모습, 가족간의 행복했던 추억들, 그 시간들이 혼자만의 삶이나 행복을 위해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어려운 순간마다 굳건히 버텨준 가족들과 나 자신이 갑자기 대견하고 고마워졌다.
글 / 정귀수 (글벗세움 회원·전직 버스운전수)